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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의 친위대와 특수부대
2020-01-16 오전 12:00:50 서울데일리뉴스 강문갑 기자 mail mkkang117@daum.net


    조선 왕의 친위대 그리고 특수부대

    1.겸사복

    지금 최고의 경호부대라고 하면 국가원수를 보호하는 대통령 경호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집권기인 1963 12 14일 ‘대통령경호실법’이 공포되면서 공식적으로 대통령 경호 업무가 시작되었다.현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최측근에서 왕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이 바로 겸사복(兼司僕)이다.조선 태종 때에 말을 관리하던 사복의 역할에 뛰어난 무예 실력을 겸비하면서 겸사복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고,세종 때에 국왕 친위병적인 모습을 갖추었다.이러한 조치로 겸사복은 국왕 직속 담당의 종2품 관청으로 승격되었고,겸사복청이라는 독자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의 겸사복은 내금위와는 달리 무예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면 반상의 구별 없이 뽑았다.또 북방 지역인 양계사람들과 북방 오랑캐지만 조선으로 귀화한 향화인들까지 의무적으로 뽑도록 법제화해 그들의 특수성을 높여갔다.겸사복을 관장한 종2품 무관직 지휘관을 겸사복장이라 하였다.겸사복의 기본적인 역할은 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궁궐 안에서 내금위와 더불어 갑주를 입고 칼을 차고 동·서로 나뉘어 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는 시립(侍立),왕이 궁궐 밖으로 거둥할 때 호종(扈從)하는 배종,근정전 앞이나 광화문 앞에서 의장대 역할을 하는 의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또한 궁궐을 수비하기 위해 입직과 수문을 맡았으며,이 외에도 어마의 사육과 점검, 목장의 관리와 유사시에 국토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겸사복이 권력의 핵심에 있게 되면서,양반 관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이 과정에서 서얼 중심의 우림위가 새롭게 탄생했고,무예가 뛰어난 서얼들이 우림위를 거쳐 겸사복으로 승진하는 것이 잠시 법문화되기도 했다.선조대에 이르러 승정원에서 “사족(士族)은 내금위와 겸사복이 있고 서얼은 우림위가 담당한다”는 전교를 내려 겸사복과 우림위를 확실히 구분하기도 했다.겸사복은 임금 곁을 지키는 권력의 핵심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며,1652(효종 3)에 금군청에 합쳐졌으며,1755(영조 31) 금군청은 용호영으로 개칭되었다.

    <친림선온도:영조가 신하에게 빚은 술울 내리던일인 선온하는 모습.마당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이 겸사복과 내금위이다>

    2.내금위

    내금위는 겸사복과 함께 왕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는 부대로써 태종 7(1407)에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태종의 신임을 받는 수하병들을 위주로 편성된 인원이 불과 6090인에 지나지 않는 정예 부대로서,내금위절제사에 의해 통솔되었으나,국가의 기틀이 잡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1424(세종 6) 내금위와 같은 임무를 띠고 있던 내시위를 통합해 200인에 이르렀으며,이들은 장번군으로서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다.양반 자제로 편제되었으며,다른 병종보다는 후대하였다.내금위는 초기에는 삼군부의 중군에 속하여 3명의 절제사가 통솔하였으나,세조 때 절제사를 내금위장으로 개칭하면서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내금위장은 종2품직으로 모두 타관이 겸직했는데, 세조 3(1457)에는 6명으로 지정되었다가 1459년에는 3명으로 축소되었다.영조시대에 만들어진 속대전에서는 정3품으로 품계가 떨어졌다.5품 이하 의관 자제(衣冠子弟) 중에서 무재(武才)가 탁월하고 키가 크며 용모가 아름다운 자들로 뽑았다.병력은 성종때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60~200명 사이에서 변동이 심했는데 《경국대전》이 완성된 후부터는 190명으로 고정되었다.조선 전기 무장 중에는 내금위 출신이 많았다.그러나 빈번한 국경지대 방위임무 등으로 왕의 호위의 약화를 가져와 이를 보충하기 위해 연산군·중종 때에는 예차내금위의 제도를 실시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내금위를 충철위로 개칭했고,예차내금위는 소적위로 개칭되어 그 수가 700인에 이른 때도 있었다.조선후기에 와서 내금위는 겸사복·우림위와 함께 금군청에 속하였다.그러다가 1775(영조 51)에는 용호영에 속했는데 당시 수는 300인으로 금군 700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여 핵심을 이루었다.1884년에 군제가 개혁될 때 내금위는 병조 판서가 관할하다가1894년에 이르러 군무아문의 편제에 따라 재편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3.체탐인

    선은 건국 초기 북방 영토를 확정 짓는 과정에서 여진족과 심한 마찰을 빚었다.압록강 부근에서 여진족은 세력을 늘리며 수시로 국경을 넘어와 약탈과 납치를 일삼았다.이는 조선의 큰 골치거리였다.아무리 국경의 경계를 철저히 한다고 해도 소수의 정예로 움직이는 여진족을 막아내기는 쉬운일이 아니었다.이에 태종은 1406(태종 6) 3월 절충장군 안우세를 동북면에 파견하여 적정을 살피게 한 다음 기병 천여 기를 동원하여 여진족을 토벌했다.초기의 체탐은 소규모 군사 활동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체탐인은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지만,대규모 군사작전을 위해 조직적으로 첩보부대를 운용한 것은 세종 15년인 1433년이라는 견해가 많다.왕이 직접 체탐자 침투를 지시하고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 이기 때문이다.체탐인은 비밀업무를 취급하는 관계로 조직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체탐인은 강변지역에 근무하는 군사 중에서 충원된 갑사(정예 기간병)와 정군(현역병)으로 1 10명을 정원으로 평상시는 1 2교대,비상시는 교대없이 근무하였다.체탐인은 대부분 군인이었으나,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귀화한 이민족도 체탐인이 되곤 했다.위험한 일인 만큼 막대한 포상이 주어졌기에 체탐인들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체탐인들에게 그 시대의 최첨단 개인화기인 세총통을 지급해 주었다.체탐인들은 세종시기 국경의 군사기지마다 3명씩 일괄적으로 배치했고 여진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평안도 지역에만 540명의 체탐인이 활동했다.


    특히 1437년 제2차 여진정벌에 큰 역할을 했다.’2차 여진 정벌당시에는 체탐인들을 활용해 여진족 주요 인물들과 은신처,공격거점을 정확히 파악하였다.여진족 최고사령부인 우라산성까지 진군에 성공하였다.체탐자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조선군은 우라산성까지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채탐자는 성종 때 해체했고 그 후부터 국경 백성들은 계속해서 여진족에 수탈당하게 됩니다.정유재란이 일어났던 1597년에는 체탐인들은 왜선이 대마도에 부지기수로 도착한 상황을 보고하기도 하였으나,그 후 조선은 청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북방의 경계를 유지했고 일본과 교린정책을 유지하면서 체탐인의 활동은 기록상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여진정벌도 / 4군6진>

    4.착호갑사(착호군)

    도심에 출몰하는 야생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불청객이다.최근에는 주택가로 내려와 소동을 일으키는 야생 멧돼지가 뉴스에 단골로 오르내린다.만약 호랑이가 지금의 멧돼지처럼 도심 곳곳에 출몰한다고 가정해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아마도 전국에 비상사태가 내려질 것이고,국민들은 동시다발로 테러를 당한 듯 엄청난 패닉에 빠질 것이다.호랑이가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것을 호환(虎患)이라 불렀다.조선왕조실록의 호랑이 관련 기록은 937회였고 피해자는 3,989명이었다.실록에 따르면,태종 대에는 근정전 뜰 안에까지 호랑이가 들어왔으며,선조 대에는 창덕궁에서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으며,영조 10(1734)엔 호랑이가 너무 많아 그 해에만 140명이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했고,영조 27년엔 인왕산 호랑이가 경복궁 경내에 들어와 새끼를 낳았으며,영조 28년엔 호랑이가 마구 돌아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극심해 조정은 호랑이 사냥부대를 따로 만들었는데,중앙의 직업군인인 갑사에서 선발한 착호갑사였다.착호갑사는1416년 임시 조직으로 편성됐고,1421년에는 40명에 불과했지만 세조 때는 200,성종 때에는 갑사 1800명 중 착호갑사를 440명이나 뽑으며 인원을 대폭 늘려 명실 공히 조선 최고의 호랑이 전문 사냥부대로 거듭나게 되었다.호랑이의 피해가 전국적으로 발생하자 지방에서도 착호갑사를 뽑으며 이때부터 착호갑사는 착호장이 이끄는 착호군으로 불렸다.착호군은 임금이 도성을 벗어나 원행 길에 오를 때면 반드시 동행해 어가 행렬의 중간과 앞에 나누어 배치되어 최측근 거리에서 임금을 모시기도 했다.임진왜란으로 조총이 도입되면서,사냥에도 조총이 사용된 것이다. 당시 조총을 쏘는 군사를 ‘포수’라고 하였다.조총은 호랑이 사냥에 유리하였다.


    17세기 이래 지방에 설치된 병영에서도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사를 두었다.평안도에는 현종15(1674) 5,000명이었던 착호군은 숙종22(1696)에는 11,000으로 늘어났다.함경도에도 18세기까지 7,000여명의 산포수가 착호군으로 활동했다.지방의 착호갑사는 군인,향리,역리,노비 가운데 지원자를 우선 선발했으며,지원자가 없으면 힘과 체격이 좋은 사람을 골랐다.호랑이를 잡아 바치는 노비는 신분을 평민으로 올려주고,평민들의 경우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며,관료의 경우에는 관직을 올려주고 상을 주었기 때문에 착호갑사가 되는 것은 신분상승의 기회이기도 했다.착호갑사는 능력에 따라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근대적인 모습을 지녔던 관료였다.정조 이후 한양에서 호랑이가 출몰한 기록은 거의 사라진다.조선 조정의 꾸준한 호랑이 사냥과 농지 개간으로 먹이가 줄었기 때문이다.실록에선 고종 때인 1868년 북악산 등에서 잡은 호랑이 다섯마리가 마지막 기록이다.당시 계속되는 총포의 실습은 포수들의 실전 능력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포수들의 능력은 19세기에 외국 함대가 통상을 요구할 때 발휘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맞서 370여명의 포수가 싸웠고, 1871년 신미양요 때 3천여명의 포수가 미국군과 맞서 싸워 전과를 세웠다. 1901년 북방 국경을 침입하는 마적단을 물리치던 포수들은 1905년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의병을 조직한 포수들은 한일합방 이후 만주로 건너가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군 활동에 투신한다.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봉오동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이었다.


    5.장용영

    1777년 왕의 처소에 자객이 침입한 존현각 자객 침입사건등 정조를 시해하려는 시도가 수차례 발생하였다.이후 친위부대의 필요성을 실감한 정조는 국왕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임시로 숙위소라는 기구를 만들었고 홍국영을 숙위대장으로 삼았다.그러나 1779년에 홍국영이 쫓겨나자,숙위소도 폐지되었다.조선 후기 중앙군은 훈련도감으로 대표되는 오군영 체제를 따르고 있었으나,오군영은 집권 세력인 노론의 사병집단으로 전락한 오래였다.이는 국왕 정조에게 크나큰 위협이었고,결국 정조는 병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호위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한다.정조의 신임을 등에 업은 장용영은 삽시간에 오군영을 압도하는 최대 규모의 군영으로 발전했으며,이후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지원세력이 됐다.


    1782년에 명하여 무예출신과 무예별감 중 30명을 선발했으며,1785년에 추가로 20명을 뽑아 장용위가 창설된 후,1788년 마침내 완성된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이 설치되었다.최고 무예를 갖춘 정예무사를 선출해 활,,검은 물론 조총,화차 등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였으며,조선과 중국,일본의 무예를 통합하여 편찬한 무예도보통지를 교본으로 사용하면서 기존의 5군영보다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특수부대로서 위용을 갖춰 갔다.50명으로 시작한 장용위는 이때부터 꾸준히 해마다 인원을 늘려 왔는데 나중에는 그 수가 무려 2만여명에 달하였다.장용영은 왕 경호와 궁궐 수비를 위한 내영과 현륭원과 화성행궁을 방어를 위한 외영을 갖춰 정조의 화성 행차 때마다 구간별로 내,외영의 군사가 호위를 맡았다.내영은 도성에 주둔하고 외영은 수원화성에 주둔하였다.장용영의 지휘는 처음에 장용영 병방이 맡았다가 1788년에 군영이 된 이후 대장을 장용사라 하고 장용영의 문서들에는 대장이라고 호칭하였다.


    조선의 관직체계상 훈련도감의 수장인 훈련대장과 장용대장은 동급이다.그러나 장교 3명의 호위를 받는 훈련대장에 비해 장용대장은 장교 4,서리 2, 아병(牙兵:대장 곁에서 군무를 수행하는 병사) 10명의 호위를 받고 있다.장용외영의 사령관인 장용외사는 수원 유수(화성유수)가 겸직하였다.장용영의 정예 기병인 선기대는 좌초와 우초로 나눠 좌초는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며 적을 기만하는 마상재를 훈련하고,우초는 별기인 기창,마상쌍검, 마상월도 등 실전에서 적의 예봉을 꺾는 기예를 훈련했다.청렴한 부대를 지향했던 장용영은 직접 농사를 지어 확보한 재정을 기반으로 수원백성들의 군포납부제를 폐지하는 등 왕권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장용영은 백성을 위한 부대이기도 했다.그러나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정조가 꿈꾸던 조선을 위해 강력한 힘이 되어준 장용영도 1802(순조 2)에 혁파되고 말았다.


    <반차도:장용대장 / 장용영 수위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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