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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반정의 유산
예종의 죽음 그리고 훈구의 탄생
2020-02-09 오전 12:00:46 강문갑 기자 mail mkkang117@daum.net


    계유정난(1453)을 통해 왕위를 찬탈한 세조.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한명회,신숙주,권람 등을 공신으로 책봉하며 세조는 공신들에게 정치적 특권뿐만 아니라 공신전(功臣田)과 대납권(代納權) 등 경제적 이득까지 챙겨주며,공신 중심의 정치를 시작하였지만, 반정으로 집권한 세조에게 공신은 필요악이었다.


    세조는 말년에 세력이 커진 구공신(舊功臣)들을 견제하기 위해 1467(세조 13)북방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구성군 이준,강순,남이 등 45명을 적인 이시애에게 성을 낸 공신이란 뜻의 적개공신을 책록,예종을 위한 친위세력을 구축하였다.이들을 신공신(新功臣)이라 부른다.지나친 공신책봉 때문에 토지가 바닥나고 민생이 피폐해져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음에도 또다시 공신을 책봉한 것이다.


    1468년 세조는 예종의 원만한 정사운영을 위해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희,신숙주,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하여 모든 국정을 상의하여 결정하는 신하들에 의한 섭정제도인 원상제(院相制)를 실시하였고,원상제는 몇 번의 혁파 논의가 있었지만 1476년까지 존속되었다.1468년 세조는 건강이 악화되자,세자 이황(예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8대 임금 예종(재위 1468~1469)이 즉위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여 없애야 했던 것들은 법 위에 존재하는 공신들의 특권과 1만 여명에 달하는 공신들 자체였다.예종은 세력이 굳건한 구공신 대신 신공신을 먼저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는데,첫 번째 사건이 남이의 옥사였다.예종은 구공신보다 신공신,그중에서도 남이를 싫어했다.남이는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반면,자신은 부왕인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468 9월 예종이 즉위하던 날,한명회가 “남이는 병조판서로 있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 아뢰자,예종은 남이를 궁궐 경비대장인 겸사복장으로 좌천시킨 것은,구공신들과 예종이 얼마나 남이를 견제했는가를 엿볼 수있다.


    세조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종의 매관매직인 분경을 재상급에 있는 공신들에게만 허락했지만,당시 재상의 자리에는 구공신,신공신 모두 있었으니 두세력 모두에게 분경이 허용된 것이다.예종에게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분경은 폐지해야 할 제도였고,1468 10 19 3정승과 이조·병조판서,왕의 종친가에까지 단속을 하여 신숙주,김질 등의 집에서 인사청탁을 하던 분경범들을 체포하였다.이 사건으로 구공신들은 긴장했고,무장세력으로 권력의 중심에 떠오른 남이가 구공신들과 종친세력에 불만이 있음을 알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적개공신 교서>

    1468 10 24일 밤,유자광이 예종을 찾아와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을 했다.남이가 겸사복장으로 궐안에서 숙위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유자광의 고변내용은 의문투성이었고  남이가 체포되어 처음에는 모반의 혐의를 부인했지만,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결국 시인했고,남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예종은 1027일 남이와 강순 등을 거열형에 처하였다.학자들은 유자광이 남이를 질투해 고변했거나 구공신이 모함했다고 하기도 한다.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원상세력들은 익대공신에 봉해졌고, 원상세력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확고해져 갔다. 남이의 옥사는 구공신의 신공신 토벌작전이었다. 예종은 유자광의 고변을 이용해 신공신을 제거하는 선택을 했지만,자신을 위한 세력을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예종은 분경을 금지하는데 성공하고,공신들의 특권을 없애던 예종은 갑자기 흉서하고 만다.재위 1 2개월,20세의 나이였다.


    예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는,겨우 족질로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 개운치 않은 점등을 이유로 공신세력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펼친 예종에 불안을 느낀 한명회 등의 공신세력과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경세자의 부인이 독살한 것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왕위 후계자가 예종의 아들인 4살의 제안대군,예종의 형인 죽은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군과 2남인 자을산군 3명이 있었는데,후계서열 세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것은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신숙주,홍윤성 등의 공신들의 추대와 자을산군의 부인이 한명회의 딸(공혜왕후)인 점도 큰 작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로 집권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 태종과 세조는 공신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나 공신과의 권력을 나누는 분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태종의 경우 공신들을 숙청한 것이 세종대에 찬란한 조선 문화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토대였다.반면 세조는 공신을 숙청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남으로써 공신 집단의 부담을 고스란히 예종에게 전해주고 말았다.국왕까지도 마음대로 추대할 수 있었던 이들 공신세력이 조선 역사에 드리운 암운은 길고 짙었다.세조의 계유정난 때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된 이들은 공신을 뜻하는 훈()자에 구세력을 뜻하는 구()자를 합성한 훈구파(勳舊派)란 거대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창릉:예종과 안순왕후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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