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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글자들<제1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
2020-03-13 오후 9:00:01 강문갑 기자 mail mkkang117@daum.net


    광개토태왕비는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391~41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비로 높이 6.39m,너비 1.3~2.0m,무게가 37톤이나 되는 동북아시아에서 최대의 비()다.1면은 11 449,2면은 10 410,3면은 14 574,4면은 9 369,글자수는 44 1,802자로,고구려 문화의 웅장함을 나타내주는 유물이다.고구려의 고도 국내성(國內城)의 동쪽 언덕에 세워졌으며,지금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吉林省 集安市)로 이름이 바뀌었다.그러나 오랫동안 이 비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광개토태왕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1445년 편찬된 용비어천가에서 나온다.그 내용을 보면 집안(輯安)에는 전하여 내려오는 대금황제성(大金皇帝城]이라고 하는 성지가 있어 그 북방 7리의 곳에 비가 있고,또 그 북방 석릉 2기가 있다고 쓰여져 있다.이 대금황제성에 있는 큰 비석을 사람들은 ‘대금비’(大金碑)라 칭했다.

    <광개토태왕비>

    일본이 제국주의를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고 정당성을 확보코자 혈안이 되었던 때,비의 탁본이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일본 헌병 중위 사카와 가게노부에 의해 일본 본토로 유입되고,일본 군부 세력은 비밀리에 탁본을 조작하여,4세기~6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에 통치기구를 세워 한반도 남부 지방을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내세워 고토 회복의 열풍이 일본 전역을 휩쓸도록 했고,한반도 남부지배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가 광개토태왕비의  신묘년 기사에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문제의 광개토태왕 비문 신묘년(391)기사 “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僞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舊是屬民),조공을 해왔었다(由來朝貢).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而倭以辛卯年來渡海) 백제□□신라를 쳐부수고(破百殘□□□)신민으로 삼으려 하였다(以爲臣民),” 구절이며 1889년 요코이 다다나오가 처음으로 주장한 해석이다.


    百殘(백잔)()사이에 마멸된 세 글자에 일본은 “任那(임나신)”을 넣어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任那以爲臣民(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가야,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만들었다)라고 해석하여 일본 사학자들은 비문에서 말하는 임나의 지배가 바로 야마토왜가 이미 4세기에 통일된 강력한 정권으로 존재 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며,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다.

    <쌍구가묵본:사카와 가게노부 중위 탁본>

    광개토태왕비 신묘년 기사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와 반박이 있었지만, (1).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 (2).而倭以辛卯年來(이왜이신묘년래) (3).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以六年 (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이육년) (1)주어는 고구려이고, (2)의 주어는 왜라는 데는 이론이 없으나, (3)의 주어는 왜와 고구려로 나뉘어져 논쟁의 초점이 되어 반세기가 넘었다.


    (3)의 주어 관련,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과 고구려와 백제,왜 간의 관계 등에 관한 사료를 종합해보면,392 7월에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10월에 백제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을 20일에 걸친 포위 끝에 쳐서 함락시켰다.394 7,백제가 침입해 왔기 때문에 왕은 정예한 기병대 5천명을 지휘해 요격해서 격파했다.395년에는 패수(浿水)에서 백제군 8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비문 396 기사:영락 6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군은 영팔성,구모로성,각모로성,간저리성(중략)등을 공취(攻取)하고,백잔은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전투에 나섰다.왕이 매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공격하였고,백잔군이 소굴로 도망쳐 성을 포위하였다.이에 백잔주(아신왕)가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포로) 1천 명과 세포(옷감)1천 필을 바쳐 항복하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태왕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에 순종한 정성은 기특히 여겼다.이때 58개 성,7백개 촌을 얻었고,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하였다.


    (원문: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首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중략)殘不服義 敢出百戰.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 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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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서울데일리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20-03-13 21: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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