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ㆍ전체기사
기사제보
광고문의

가장많이 본 기사
이메일 프린트 퍼가기 글자크기 원래대로 글자크기 크게 글자크기 작게
젊은 금수저들 개혁을 넘어 혁명을...
고종의 묵시적 동의
2020-05-11 오후 8:30:14 서울데일리뉴스 강문갑 mail mkkang117@daum.net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인조반정 등등 우리 역사에서 군사력에 의한 정권교체는 수차례 있었다.물론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도 군사력을 동원했다는 측면에서는 이들의 군사반란과 닮았다.전근대사회의 군사반란은 지배계급 내의 권력교체로 그 과정은 대중의 동의를 얻지 않았고,실제로도 얻을 필요가 없었다.갑신정변 역시 전근대사회의 군사반란이었지만 목적과 역사적 지향은 앞서의 반란과는 질적으로 다르고,그래서 한국사에서의 수많은 군사변란 중 유일하게 변혁운동으로 규정되고 있다.김옥균 등의 행위는 정권탈취를 위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조선의 근대화와 청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목표로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갑신정변 핵심세력들은 왕족이나 고위관직에 있던 사대부들이 거주했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에 거주했다.박영효의 집 2,700평을 팔아 만든 5천원(현재가치: 45억원)을 갑신정변의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30대의 김옥균을 제외하면 20대의 젊은이들로 명문가 출신 자제들이었다.김옥균(1851~1894)은 정변 당시,33세로 강릉부사를 지낸 안동 김씨 김병기(1818~1875)의 양자로 들어가 스물둘에 문과에 장원급제했고,청요직에 두루 등용되어 재질을 인정받고 명망을 얻었다.1881 12월부터 일본을 시찰하는 중에 임오군란으로 잠시 권력을 잡았던 대원군은 김옥균이 귀국하는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대원군이 천진으로 압송되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


    홍영식(1855~1884)은 정변 당시 29세로,187318살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그의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1816~1884)이다.1883 6,보빙사 일행으로 미국을 시찰하고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884 3월 우정국 총판에 임명되어 우정국을 설치하였다.서광범(1859~1897)은 정변 당시 25세로 1880년 문과에 급제했다.1883 6,보빙사 일행으로 미국과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1884 5월 귀국하여 1884 6월에 승정원 동부승지,1884 7월에는 군국사무 참의에 임명되었다.


    박영효(1861~1939)는 정변 당시 23세로 12세가 되던 1872,철종의 넷째 딸 영혜옹주(1859~1872)와 결혼으로 부마가 되어 금릉위에 봉해졌고,혼인 3개월 만에 영혜옹주가 병사하였지만,부마로서 박영효의 지위는 계속되었다.서재필(1864~1951)정변 당시 20세로,1882년 별시문과에서 병과3등으로 급제하여 김옥균의 권유로 생도 14명과 함께 1883 5,일본에 건너가 육군호산학교 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1884 6 30,설치된 임시 사관학교인 조련국을 설립하고 사관장이 되었다.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도모했던 개화세력은 개항 후 개화정책 추진과정에서 개화파라는 정치세력으로 형성되었으며,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국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의 심화와 개혁방법론을 둘러싸고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분화되었다.온건파는 청국에 대한 사대외교를 유지하면서 동도서기론(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이론)에 따라 점진적인 개화를 주장하였다.


    반면에 급진개화파는 청국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우선이며,친인척을 등용하여 임오군란과 각종 민란을 유발한 민씨 정권 역시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했다.급진개화파는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근대적 국가로 바꾸자고 했으며,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각 계층들을 모아 '충의계'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충의계는 43명으로 시작하였지만 1884년 경에는 계원수가 약 1,000명에 달했다.급진개화파는 자파를 개화당 혹은 독립당으로 부르고 온건개화파를 사대당 혹은 수구당이라 불러 차별성을 부여하였다.

    <갑신정변의 핵심인물:김옥균,홍영식,서광범,박영효,서재필>


    청국을 뒤에 업은 온건파는 권력을 독점하여 장애가 되는 인물들을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조치를 취했다.박영효는 1882 12,한성판윤을 거쳐 1883 3월에는 광주유수로 좌천되었고,조선 정부는1883 3 16일 동남제도개척사를 신설하고,김옥균을 개척사로 임명하여 울릉도를 비롯해 동해 일대에 산재해 있는 섬들의 개척과 고래잡이 관련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김옥균은 재정마련을 위하여 포경사업을 발전시켜 나가자,온건파는 김옥균을 다시 불러올려 1883 4월 이조참의, 188310월 호조참판으로 임명하고 감시하였다.

    시 조선은 개화정책 추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있었다.온건파와 묄렌도르프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당오전 발행을 주장하자.김옥균은 당오전을 주조하면 재정위기가 타개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재정파탄을 초래할 것이니 일본으로부터 300만원의 차관을 얻는 것이 유리하다 (승정원일기.1883.4.11)”며 차관도입을 주장하였다.결국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온건파의 의도대로 당오전이 발행되었고,그 결과 물가는 폭등하고 국가 재정은 탐관오리들의 농간으로 더욱 어려워졌다. 당오전은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5배에 달하는 가치로 정해졌지만 실제로는 상평통보와 동일한 가치로 통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관리들은 조세를 상평통보로 거둬들이고서 국고에 상납할 때는 당오전의 액면가로 납부하고 그 차액을 챙겼던 것이다.잘못된 통화 팽창 정책으로 국가 경제가 완전히 파국에 이르고 만 것이다.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위해 고종의 위임장을 지참하고 왔으나 위임장이 가짜라는 온건파의 역공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김옥균이 지닌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 보고했다.이는 묄렌도르프와 온건파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다.결국,김옥균은 차관도입에 실패하고 1884 4월 귀국하였다.

    <1883년 당시 한양(좌)과 뉴욕(우)>


    차관 교섭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급진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박영효가 추진하던 양병사업은 자금부족으로 온건파의 지휘 아래로 편입되었으며,박영효는 광주 유수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도 청나라 군사들의 행패를 보도한 것이 말썽이 되어 일본인 기술자들의 추방과 자금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청국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가 더욱 심화되자 미국 정부에게 청국의 간섭을 물리쳐 달라'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이에 급진개혁파와 고종은 청국의 견제세력으로 러시아 측과 접촉 끝에 18845 15,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민영익(1860~1914)은 한때 개화파의 영수로 지목될 정도로 김옥균,박영효 등과 가깝게 지냈다.1884 5 9,민영익이 보빙사로 미국과·유럽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후 온건파로 전향하면서 급진개화파의 위기의식은 고조되었다.민영익은 누구보다도 바깥세상을 많이 본 인물이었지만.청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민씨 척족의 권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던 그는 18848 26,우영사로 임명되어 군권을 장악하고,청군과의 유대를 강화시켜 나가면서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군에서 축출하는 등 개화파 활동을 제약했다.미국공사관 무관의 보고에 의하면 그로부터 김옥균 등과 민영익은 함께 국사를 논의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1884년 여름 베트남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국과 프랑스가 대립하여 전쟁이 발발하자,청국은 용산 주둔 청군 3,000명 중 절반을 베트남전선으로 급히 파병한다.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급진개화세력에게 또 다른 국면이 찾아 온 것이다.1884 9,일본공사 다케조에가 개화당에 대한 종래의 적대적 태도를 바꿔 개화당 인사들과 자주 접촉하기 시작했다.일본은 청불전쟁으로 군사력이 분산되어 있을 때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김옥균에게 군사 지원을 약속하며 정변을 부추긴다.10월 초,청국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급진개화파는 청국이 조선 문제에 개입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정변 단행을 기획한다.


    10 8,김옥균은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찾아가 그동안 준비해왔던 구체적인 계획을 최종적으로 협의확정했다.김옥균은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측으로부터 공사관 병력 150명과 3백만 엔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정변 5일 전,김옥균은 고종을 알현하고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모종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아뢰었고,고종은 국가의 대계와 관련된 일은 위급할 때에 경의 대책에 일임할 터이니 경은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며 친서 한 장을 써주고 김옥균을 내보냈다.이것은 고종이 김옥균이 벌일 거사에 대해 묵시적 동의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10 13일 거사 날짜를 10 17일로 결정하다.


    <서울데일리뉴스 강문갑의 다른 기사 보기>
    <저작권자©서울데일리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20-05-11 20:30 송고
    젊은 금수저들 개혁을 넘어 혁명을...
    대표인사말 | 광고/제휴 안내 | 이용약관 | 청소년보호정책 | 개인정보처리방침
    서울데일리뉴스 등록번호 : 경기 아51976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미금일로90번길 32, 335호 (구미동)   TEL : 031-604-2221
    발행인 : 정미숙, 편집인: 박선철, 청소년보호책임자: 박선철
    Copyright© 서울데일리뉴스. All right reserved. mail to : scottie_par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