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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天天…"을 외치다.
10월 19일-아아 모든게 끝이로구나
2020-05-17 오후 2:46:33 서울데일리뉴스 강문갑 mail mkkang117@daum.net

    1884 10 17() 저녁 7시경,우정총국 건물이 완공되어 축하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우정총국은 해외를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의 건의로 근대식 우편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1884년에 설치한 관청이었다.낙성식에는 주조선 외국 공사,영사를 비롯해 민영익 등 수구파 인물들이 참석했다. 9시경 우정국 낙성연회가 끝나갈 무렵 개화파의 행동대가 안동별궁(풍문여고 정문 부근)옆 초가에 불을 질러 불길이 솟구치고 소란이 일자 이를 살펴 보러 나간 민영익은 칼을 맞고 비틀거리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우정국 연회장을 나온 김옥균 등은 창덕궁 금호문을 통해 고종의 침전으로 달려가 우정국에 변고가 일어났으니 고종에게 서둘러 경우궁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중전 민씨는 일본군이 일으킨 것인가 청나라군이 일으킨 것인가하며 김옥균을 추궁하는 사이 푹음이 들려왔다.궁녀 고대수(?~?)가 통명전에서 폭약을 터뜨린 것이다.혼비백산한 고종과 중전을 모시고 요금문을 나와 경우궁으로 향하는 도중에 김옥균은 고종에게 “일본군사를 요청해서 폐하를 호위하도록 하면 만전을 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고 진언하였다.김옥균이 “친필칙서가 없으면 일본군사가 오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아뢰자 고종은 연필로 “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고 써 주었다.김옥균은 친필칙서를 박영효를 시켜 다케조에에게 전하게 하였다.

    <초대 우정총판 홍영식 동상(명동 중앙우체국)>


    폭약을 터뜨린 고대수는 7척 장신에 힘이 웬만한 남자 몇 명쯤은 너끈히 감당할 정도였으며 키가 너무 커서 바지랑대에 옷 입혀 놓은 것처럼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지만 궁중의 액막이로 뽑혀 입궐한 무수리였다.중전 민씨는 궁중에서 자주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였다.이때 액막이가 등장한다.그녀는 이 굿판의 액막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종 일행이 경우궁에 도착하자,박영효가 다케조에와 함게 병력을 배치해 경우궁 외곽을 지켰다.그리고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 13명이 국왕의 거처 바로 앞을 지키고 출입자를 통제하면서 고종을 중심점으로 3중·4중의 철통같은 호위체제가 편성되었다.정변은 일단 성공의 안정권에 들어선 것이었다.

     

    1018일 새벽,개화파들은 왕명으로 수구파의 중심 인물인 민씨 척신세력과 수구파 군사 지휘권자들을 불러들여 경우궁 입구에서 처단하였다.고종이 연거푸 죽이지 말라는 전교를 내렸으나 소용없었다.경우궁으로 옮겨올 때만 해도 고종과 중전 민씨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그렇지만 대신들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정변임을 깨달았다.18일 아침,심상훈(1854~1907)이 개화당으로 위장하고 경우궁에 들어와 중전을 알현하였다.경우궁으로 이동후 고종 알현을 위해 찾아온 수구파 대신들을 모두 죽였는데 심상훈만은 죽이지 않았다.심상훈을 처단하지 않았던 것은 정변 주도자들에겐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을 듯하다.

     

    중전 민씨는 심상훈을 통해 민영환(1861~1905)에게 내부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소식을 전할 일이 있으면 수라상 밑에 서찰을 붙여 올리라고 덧붙였다.심상훈의 연락을 받은 민영환은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환궁하면 일이 수월하리라는 서찰을 보냈다.중전 민씨는경우궁이 불편하니 창덕궁으로 환궁하겠다고 끈질기게 요청하자.김옥균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면 청군의 공격에 방어하기 어렵다하여 반대하였으나 다케조에는 "창덕궁으로 환궁해도 경비에는 문제가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18일 오후 5,박영효 등이 일본군의 중대 병력과 함께 고종과 중전을 창덕궁 관물헌으로 모셔갔고,이곳을 그들의 작전본부로 삼았다.10 19일 오전 10,혁신정강 14개조를 공포했다.

    <좌:창덕궁 전경/우:창덕궁 내 관물헌>


    김옥균의 <갑신일록>에 기록된 혁신 정강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며,청국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폐지할 것.이것은 국부인 흥선대원군이 청국의 볼모로 끌려가 있어서야 어찌 자주국이라 할수 있겠는가라며 조선의 개화를 반대했던 정치적 정적인 대원군을 곡 돌아오도록 하여,대원군 세력의 규합과 민중의 지지를 얻는 동시에 청으로부터 독립하여 서구제국들과 대등한 근대적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2: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3:조세제도를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할 것. 12:재정을 일원화하여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할 것.

     

    13:대신과 참찬은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 공포한다.이것은 종래의 전제군주권에 제한을 가하고 입헌군주제의 초기 형태인 내각제도 수립을 결정한 획기적인 것이었다.14:정부 조직을 전통적인 의정부와 육조로 일원화하고,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한다는 것은 정부조직의 근대적 개편을 선언했음을 보여준다.하지만 혁명은 여기까지였다.19일 오후 4시를 전후하여 중전 민씨와 비밀리에 연락을 취한 청국의 원세개가 본국과의 논의도 없이 독단으로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돈화문과 선인문을 거쳐 창덕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마침 이 때에 조선과 일본의 우편선 지도세마루(千歲丸)호가 입항하여 일본 외무대신의 훈령이 전달되었다.

     

    일본 외무대신의 훈령 내용은 청·불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청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일본공사관의 병력을 정변에 가담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당시 개화파는 친군영 전·후·좌·우의 4영 중에서 전영만 확고하게 장악하였고,후영은 북청병정 외에는 충분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청군 1,500명이 양면으로 공격해 오자,외위(外衛)인 돈화문을 담당한 전영과 후영 1,000여명의 조선군은 대항하였지만 중과부적과 무기의 열세로 패퇴하여 흩어지게 되었다.또한 친군영 좌영과 우영은 전혀 장악하지 못한 결과,정변 도중 대세가 청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자 좌영과 우영 조선군 병사들은 청군에 합류하여 원세개의 지휘를 받는 형편이었다.

     

    좌우영군 1,000명은 청군에 합류하여 중위(中衛)인 인정문을 지키던 일본군을 공격했고 일본군과 청군과의 교전이 시작되자,중전 민씨 일행은 궁궐을 빠져나가 북묘로 향했다.고종의 어가가 북묘로 향하는 것을 발견한 김옥균은 북묘행차를 만류하여 비원의 연경당으로 모셔왔다.다케조에의 일본군이 연경당을 경호했지만 몰려오는 청군과 일전을 피할 수 없었다.청은 일본군의 퇴로를 안전하게 보장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일본공사에게 보내자,몇 시간 전투를 벌이던 일본공사는 철수를 명령했다.전세가 불리해지자 급진개화파는 고종을 인천으로 데려가 후일을 도모하려 했으나,고종이 반대하여 이루지 못했다.

    <좌:갑신정변 핵심인물/우:갑신정변 전개도>


    반청기치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고종은 정변세력이 대신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모습을 보고 느꼈을 신변의 위협과 입헌군주제 성격을 띤 혁신정강에 왕권을 잃게 될 위기감으로 급진개화파에 등을 돌리게 됨으로써 정변은 실패의 수순을 밟게 된다.결국 홍영식 등은 고종을 수행하여 중전이 있는 북묘로 향했고,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공사관으로 퇴각하였다.김옥균은 북묘를 향하는 고종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아,모든 게 끝이로구나.’ 이로써 개화파가 일본을 업고 벌인 갑신정변은 허망하게도 10 17일 밤9시부터 19일 저녁 7시까지 46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다.

     

    고종과 중전 민씨는 임오군란에 이어 또 한 번 청국 군대를 불러들임으로써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 국가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갑신정변 이후 일시 귀국했다가 다음 해 8월 조선으로 온 원세개는 식민지 총독과 비슷한 '감국대신 역할을 하게 된다.양국의 역사에서 청의 관리가 조선에 주재하며 온갖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는 총독 행세를 한 것은 원세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청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화되었고,갑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조선은 이미 병들다 못해 썩을대로 썩어버린 상태였다.중전의 악행과 탐관오리들의 패악질에 견뎌내지 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 선 것이 1894년 갑오농민전쟁 즉 동학혁명이다.동학혁명이 일어나는 그때까지 조선은 어둠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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