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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김옥균 상해에서 암살되다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죽음을
2020-05-23 오후 3:07:46 서울데일리뉴스 강문갑 mail mkkang117@daum.net

    갑신정변은 청군이 개입하면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홍영식은 피살되었고,김옥균을 비롯한 9명은 다케조에와 함께 창덕궁 북장문을 빠져나와 일본공사관과 제일은행점장 집에 숨어 있다 인천으로 가 1884 10 24일 새벽,우편선에 승선하여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이후 김옥균은 살아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청국과 조선은 그들의 송환을 요청했고 외교문제가 되자 일본정부는 김옥균 일행을 냉대하게 되었다.1885 4월 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은 미국으로 건너갔지만,김옥균은 이런저런 이유로 끝내 도미하지 못했다.

     

    청군의 도움으로 정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1884 12월말,서상우(1831~1903)를 일본에 보내 옥균을 인도해줄 것을 요구하였다.옥균을 돌려보낼 경우 일본이 정변에 관여한 사실을 우려한 일본정부가 송환을 거절하자,민씨 정권은 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일본으로 밀파하였다.첫 번때 자객은 장은규(?~?)였다.1885 6월 민응식(1844~?)의 명을 받은 장은규는 일본으로 건너왔다.장은규는 옥균이 일본의 낭인과 더불어 조선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는 낭설을 보고해 소란을 피웠을 뿐 암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1886,민병석(1858~1940)은 통리군국사무아문주사 지운영(1852~1935)을 두 번째 암살자로 보냈다.

     

    동경에 도착한 지운영은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면담을 요청했으나,김옥균은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라는 답신을 보내 지운영의 면담 제의를 거절했다.김옥균은 유혁로(1851~1945)등에게 지운영이 자객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잡도록 했다.어느날 지운영은 유혁로 등에게 고종의 칙서를 보이면서 김옥균을 처치하면 망명자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자신은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 왔으므로 도와달라고 본색을 드러냈다.고종의 옥쇄까지 찍힌 이 칙서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어쨌든 "바다 건너의 역적을 체포하는 특명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었다.

     

    게다가 김옥균 살해에 성공한 자에게는 5천원을 지불한다는 지불보증서도 가지고 있었다.증거를 확보한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포박한 뒤 일본경찰에 넘겼고,옥균은 고종에게 <지운영사건 규탄상소문>을 올렸다.”지운영이란 자가 동경에 와서,某某에게 말하기를대군주의 특명을 받고 전권포적대사의 위임장을 가지고 왔으니,(지운영)를 위해서 역적 김옥균을 베어 주기만 하면,5일 동안을 기약하여 금 5천원을 상으로 줄 것이다.만일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 상금을 주지 않을 때는 임금의 친필 위임장을 가지고 조선 정부에 즉시 그 금액을 요구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중략)

     

    지운영이 갖고 온 위임장은 폐하께옵서 친히 주신 것이옵니까? 또한 너에게 명하여 특별히 바다를 건너가 적을 잡을 책임을 맡기는 바이니,편리할 대로 처리하도록 하고 국가를 위하는 일도 역시 전권을 맡기는 바이니,잘못이 있게 하지 말라고 하시고,어새를 찍었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중략) 바라옵건데 대원군에게 국가의 전권을 위임하고,대원군에게 과실이 있거든 폐하가 주권을 발휘하여 바로잡는 것도 위급함을 구하는 방책이며,박영효,서광범서재필을 소환하여 신임하시면 나라의 동량이 될 것입니다.신에게는 사실이 아닌 죄명을 없애주시면 곧 천하의 공론에 좇는 것이라고 할 것이옵니다.

     

    김옥균은 지운영사건 규탄상소문에서 개화파 정부의 부활을 요구하면서,대원군에게 일시적으로 국가전권을 위임할 것을 제기하고 있다.김옥균이 대원군의 정치적 지도력 혹은 그에 대한 백성의 지지도를 높이 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한편 일본은 김옥균이 양국 간의 마찰의 불씨가 되자 김옥균을 변방으로 추방키로 하고,동경에서 1,000km 떨어진 작은 섬 30여개가 흩어져 있는 오가사와라 제도로 유배를 보내기로 했다.김옥균을 태운 배는 8 9일 출발하여 폭풍으로 21일이나 바다에서 시달린 끝에 8 29일 오가사와라제도에 닻을 내렸다.

    <좌:김옥균 이동로/우:오가사와라 제도>


    1888 7월에는 홋카이도로 이송시켰고,1889 2월 홋카이도 내에서 이동의 자유를 허락했으며,1890 11월이 되어서야 자유의 몸으로 풀려난 김옥균이 동경으로 돌아오자,1892 5,왕실의 명을 받은 민영소는 이일직(?~?)을 쌀 무역업자로 위장시켜 일본으로 보냈다.이일직이 암살을 결행하지 못하는 동안,당시 프랑스 유학생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홍종우를 이일직이 포섭하였다.홍종우는 김옥균을 만나보고 옥균이 재기해 권력을 장악할 것 같으면 그에게 달라붙고,아니면 처치해서 민씨 정권에 공을 세우면 될 게 아니냐는 계산이었다.


    언젠가 옥균은 이일직에게 망명생활도 벌써 10년이 되어가오.자금이 부족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오.계책이 있으면 말해주시오이일직과 홍종우는 중국에서 재원을 모으라고 권하고 상해행을 종용했다.옥균은 이홍장의 아들이자 당시 주일청국공사관의 외교관이었던 이경방을 잘 아는 처지이니 중국에 가면 편리할 것 같다.이홍장이 힘써준다면 대충 일이 될 것이다고 했다.그리하여 1894 3 24일 옥균은 홍종우와 가이군지를 비롯한 3명의 일본인과 함께 상하이로 향한다.가이군지는 1881년에 김옥균을 만나 동행하며 시중들던 인물이었다.

     

    3 27일 상하이에 도착해 동화양행에 여장을 풀었다.3 29일 오후 3,옥균은 양복저고리를 벗고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책을 펼쳤다.’자치통감이었다.홍종우는 서둘렀다.권총을 꺼내 옥균의 머리를 겨누어 쏘았다.첫번째 맞은 곳은 왼쪽 볼이었다.그 탄환은 볼을 뚫고 올라가서 턱의 오른쪽을 관통하였다.다시 총격을 가하였다.그 탄환은 왼쪽 가슴을 뚫고 오른쪽을 통과하다가 피막을 뚫지 못하고 멈추어 있었다.그리고 제3탄은 어깨 밑을 관통하였다.풍운아 김옥균은 43세의 나이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다.홍종우 역시 개화를 꿈꿨던 엘리트로서 신()권 중심의 개화를 꿈꿨던 김옥균과 달리 홍종우는 왕()권 중심의 개혁을 원했다.홍종우에게 김옥균은 처단해야 할 역적일 뿐이었다.

    <좌:동화양행 호텔/우:김옥균 암살 38 리볼버 권총>


    옥균이 죽었다는 소식에 조선과 일본간에 시신 쟁탈전이 벌어졌다.김옥균의 시신은 일본으로 보내려 했으나,상해 경찰이 조선 정부의 인도요구에 응함으로써 청국 군함에 실려 4 12일 인천에 도착했다.옥균의 시신을 넘겨받은 조선은 옥균을 대역부도한 죄인으로 규정해 양화진에서 육시의 참형에 처하였다.4 28일 일본 <지지신보>는 능지처참 현장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 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발 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그 다음 양쪽 팔목을 잘랐다.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동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치,길이 여섯 치씩 열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갑신정변때 서재필의 칼에 응징당했던 환관 유재현(?~1884)의 양아들은 옥균의 배를 갈라 간을 씹어 먹었는데,유재현은 개화당을 배신하고 수구당으로 간 자였다.이 소식을 들은 중전 민씨가 했다는 말이 매천야록에 전한다.”(유재현의 아들은 그렇게 장한 일을 했는데)민씨의 자식들은 무엇하노?” 간이 내어진 몸통은 한강에 던져졌고,머리는 효수되었는데,“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는 홍종우의 끌씨가 걸렸고,여러날 동안 거리에 내걸어 보였다.고종과 중전은 이날을 축하해 외국 공사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가이군지는 옥균의 시신 몇점과 머리카락,옷가지를 수습하여 일본으로 돌아와 진정사(眞淨寺)라는 사찰에 매장하였다.

    <좌:대역부도옥균 /우:김옥균과 가이군지의 묘>

     

    1895년 홍종우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급제한다.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 과거시험은 김옥균 암살에 공을 세운 홍종우를 뽑기 위한 시험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그래서 백성들이 이 과거시험을 종우과라고 불렀다고 한다.고종은 왜 김옥균 암살에 집착했을까? 고종은 갑신정변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했고,역적 처단을 전면에 내세워 반전의 기회를 노린 것이었으며 차후라도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철퇴를 가해야 했던 것이다.김옥균은 1883년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동남쪽의 섬들을 개척하는 동남제도개척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기 때문에,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정보를 가장 정확하고도 폭넓게 확보할 수 있었다.

     

    동남제도개척사로 활약했던 1883년부터 1884년까지 최신의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여지도>를 제작하였다.조선여지도는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휴대했던 조선전도이며,1894 3월 상하이로 건너가기 직전 일본에 남겨둔 것을 바탕으로 일본인 시미즈가 1894 7 1일에 원본보다 작게 제작·발행하였다.중국과 일본의 영토는 무색으로 처리하고 조선의 영토는 각종 색깔로 표시함으로써 조선과 주변국간의 영토구분을 분명하게 하고 있으며,울릉도와 독도는 강원도와 같은 옅은 주황색으로 칠해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확실하게 표시하였다.좌측 상단에는 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박영효가국권·민권·군권을 계승하여 융성하게 한다는 의미의소융삼보(紹隆三寶)’ 라는 4글자가 쓰여 있다.

    <김옥균의 조선여지도>


    유길준이 쓴 묘비명은 이렇다."슬프다.비상한 재주를 가졌으나,비상한 시대를 만나,비상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비상한 죽음을 맞이하였도다.(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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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서울데일리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20-05-23 15:07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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