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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고려청자 수난시대
일본-그들은 고려청자를 도적질 했다
2020-08-03 오전 10:56:36 서울데일리뉴스 강문갑 mail mkkang117@daum.net

    고려왕릉은 태조의 현릉부터 34대 공양왕의 고릉까지 왕과 왕비의 능은 총60기로 알려졌으나 능의 소재가 확실한 것은 태조의 능인 현릉을 비롯한 19기에 불과하며,국가차원에서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려왕릉들은 긴 널길과 돌로 만든 널방을 가지고 있는 형태로,위에 덮인 봉토분과 돌만 걷어내면 무덤 내로 진입할 수 있어 도굴꾼들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일제강점기때는 총독부에서 발굴조사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인 도굴과 훼손을 반복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고려청자와 부장품들이 유실되거나 반출당했다.


    1894년 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 승전 후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장악한 일제는 헌병과 경찰 등으로 구성된 도굴단을 조직하고 개성 일원의 왕릉을 포함한 고분들을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전후의 일이었다.그들이 노린 것은 고려자기였다.총으로 주민들을 위협하고 매수하여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서 고려고분을 도굴하여 고려자기와 부장품을 약탈해갔다.이는 일제에 의한 한국문화재 수난 초기의 최대의 만행이었다.고려자기는 고려고분에 시신과 함께 묻혀 있던 기물(器物)이었다.

    <좌:고려 4대 왕 광종(헌릉) / 우:고려 9대 왕 덕종(숙릉)>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청자가 최고의 문화재라는 인식을 퍼뜨리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그는 최대의 장물아비로 비난받을 정도로 1906 3월 통감 취임 이후 재임하는 동안 1000여 점이 넘는 고려청자를 수집했다고 전한다.그가 반출한 도자기 중 일품(逸品) 103점은 일본 왕실에 헌상되었다가 1966년 한일회담 때 반환되었다.상류층 문화의 모방,즉 수집 계층의 수직적 확산이 일어나 19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고려청자 수요자군은 총독부 관리에서부터 학자 은행가,법률가 등 다양한 직종으로 다각화되었다.


    그리하여 1910년대 초중반 품귀현상이 생겨날 정도로 고려청자는 본토의 상류층과 돈 있는 수집가들에게 대유행을 일으켰다.수요와 공급 논리에 의해 가격 상승을 불러왔고,경제력 격차에 따른 진입 장벽을 만들었다.고려청자 붐이 일어나면서 1922년 합법적인 문화재 반출구로 설립된 미술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고려청자는 경매에 나오기도 전에 다 팔렸고,불법발굴과 장물거래로 먹고 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에밀 마르텔(1874~1949)은 서울에서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하던 때의 일화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조선인이 골동품을 팔러 오는 광경은 매우 재미있었다.그들은 골동품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소중하게 들고 오지만 그 태도가 심상치 않고 주위를 살피는데 어딘가 불안에 쫓기는 듯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양반의 소장품을 몰래 부탁받고 팔러 오는 경우와 고분의 도굴품을 밀매하러 오는 경우였다.고려자기 도굴 및 거래업은 당대 조선의 각광받는 산업이었다.도굴단은 일본인 골동품상과 수집가를 통한 판로가 확대되면서 도굴지역을 개성에서 강화도와 해주 쪽으로 넓혀 나갔다.

    <일본 중요문화재(보물급)로 지정된 고려청자 연당초문정병(좌)과 용모양 정병(우)>


    개성,해주,강화도 등지에서 도굴꾼을 동원하여 고려왕릉을 비롯 2천기 고분들에 대해 대규모적인 파괴행위를 감행했다.개성이나 강화,해주,장단의 고려고분은 쑥대밭이 되었고,어떤 곳은 무덤 한 곳이 2~3번이나 도굴되기도 했다.일제가 직접 발간한 <고적조사보고서>에도 1905 15대 숙종과 20대 신종 왕릉 도굴,19066개 왕릉 도굴,1907년 왕릉 2기 도굴,1910년과 1912년 각각 1기의 왕릉 도굴 사실이 기록돼 있다.이토는 있는 대로 고려청자를 싹쓸이했다.일왕가와 귀족들 사이에서 고려자기는 최고급 선물로 통했다.


    고려청자는 당시 서양에서 최소한 수백원에 거래됐는데 조선에서는 10원정도면 구입 가능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큰 이문이 남는 장사였다.일본으로 반출된 고려자기는 유럽과 미국 등으로 팔려나갔다. 1907,일제는 총리대신 이완용으로 하여금 고종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덕궁에 박물관을 지어 도굴한 고려자기를 통감부 관리들을 통해 조선 왕실에 고가로 팔아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비싸야 30원 정도가 고려자기 값이었는데,<포도동자무늬 표주박모양 주자>950원을 받고 조선 왕실에 팔아버린 것이다.

    <포도동자무늬 표주박모양주자>


    우리 것을 불법으로 도굴해 온 자들에게 거액의 돈을 왕실에서 지불하도록 한 역적이 이완용 총리대신이었다.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창덕궁박물관의 고려자기 6,562점의 출토지를 보면 99%가 개성 부근으로 기록돠어 있는데,그 대부분이 일본인들로부터 사들인 도굴품들이었다.옛 도자기 문화를 연구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1884~1964)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에서 어느날 이태왕(고종황제)전하께서 처음으로 박물관을 구경을 하시게 되었을 때,이 청자는 어디서 만들어진 것이오?하고 묻자.

    이토 통감이 이것은 이 나라의 고려시대 것입니다하고 설명을 하니,전하께서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거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그러자 이토는 밀을 못하고 침묵해 버렸다.남의 무덤을 파헤쳐 건져낸 도굴품이라는 설명은 할 수가 없었으니까." 고종황제는 청자가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이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침묵했다.

    고려 조상들은 귀천에 따라 구분은 있었지만,저승 갈 적에 청자그릇 하나 쯤은 무덤 속으로 가져가는 풍습이 있었다.그래서 오늘날까지 고려청자가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만 점의 고려청자가 일본 및 해외로 반출됐고 소수만이 한국으로 돌아왔다.현재 국내의 모든 박물관 소장품과 민간 소장의 고려자기는 약 2만 점에 불과하지만 그 배 이상을 일본인들이 갖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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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서울데일리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20-08-03 10:56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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