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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왜란-1894년 일본의 조선침략.3
조선 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 계획
2020-08-25 오후 12:04:18 서울데일리뉴스 강문갑 기자 mail mkkang117@daum.net


    전주화약은 동학농민군과 초토사 홍계훈이 폐정개혁안을 국왕에게 보고하고 농민군의 안전 귀가와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1894 5 8일 체결되었다.5 18일 전봉준은 귀향하는 동학농민군 32명을 도륙한 나주목사의 행패를 지적하며 순변사 이원회(1827~?)에게 홍계훈이 신변보장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행위이며,폐정개혁안의 시행을 촉구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소원대로 되지 않을 경우 뒷날 다시 봉기할 것임을 천명한 동학회생등장(等狀:여러 명이 연명하여  관부에 올리는 진정서)을 제출하였다.


    전라관찰사로 부임한 김학진(1838~1917)5 19동학농민군의 책임을 묻지 않고,농민군의 거듭된 폐정 개혁에 귀를 기울이며,당면한 세금 부담을 면제하겠다.’고 약속하는 효유문을 발표하고 동학농민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김학진은 효유문에서 민중의 호소를 대변하는 지방관으로서 폐정개혁을 시행하는 집강소 설치를 약속했으며,이후 전라도 53개 군현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토대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전쟁의 휴지기가 됨에 따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약화되자 일본은 5 17일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 시찰요원을 파견하여 농민군의 실상을 파악하는 한편,이른바 내정개혁을 빌미로 조선문제 개입명분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되었다.일본의 내정개혁 제안은 당면 과제였던 철병을 회피하고 주둔을 계속하기 위한 구실을 마련함과 동시에 내정개혁으로 청국을 도발케 함으로써 개전에 끌어넣고자 하였다.


    이 무렵 조선주재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1848~1906)는 청국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조선에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하여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세부적인 계획을 작성한다.복궁 점령계획에 의거  일본은 철군 대신 병력을 증파하여 514일에는 혼성여단 4,000여 명이 한성과 제물포간의 요충지를 점거했으며,5 24일에는 부산에서 한성까지 전선을 가설하라는 대본영의 명령이 내려졌고,병력 4,010명이 증파되어 용산 만리창에 포진하였다.


    일본군 혼성여단의 규모는 청군보다 약 3배 이상의 우위에 있었다.전체 8천여 명의 병력 가운데 1천여 명은 부산과 원산에,1천여 명은 제물포에 주둔하였으며,군용전선 가설대를 제외한 5,000여 명의 대병력은 용산에 주둔하였다.사실 2개 연대 5,000여 명의 병력만으로 한성 전체를 포위한다는 것은 어려웠으며,이 때문에 접근이 용이한 숭례문 일대를 중심으로 병력을 집중배치했다.11연대는 한성 외곽의 조선군이 호응하는 것을 저지시키는 임무를,21연대가 본격적인 한성 내부를 정리하는 임무였다.

    <일본군 배치도>



    경복궁 점령 주력부대는 21연대 2대대가 맡았고,1대대 일부 부대가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6 14일 일본은 영국과 조선 경략시 영국의 협력을 얻는<영일개정조약>조인에 성공하자,병력을 한양도성 안으로 진입시켰다.영국의 외교적 지원에 고무된 일본은 조선에서의 일본군 철수 거절 전문을 청국에 보냈으며,6 18일 일본공사는 청국 군대의 철수,청국과 조선의 수륙무역장정 폐기,군용전선 가설,일본군 병영 막사 건설을 명시한 내정 개혁안을 조선에 통고하고,회답 기한을 6 20일로 못 박았다.


    일본공사는 기한인 6 20일이 지났는데도 조선 조정으로부터 회답이 없자.1894 6 21일 새벽 0 30,일본공사가 조선에 주둔 중이던 오시마 요시마사(1850~1926) 혼성여단장에게 전보를 내린다.”계획대로 실행하라일본군은 점령할 지역을 경복궁으로 국한하지 않았다.일본군은 병력을 주요 조선군 군영까지 장악하는 한양 전 지역에 대한 점령작전을 실행한다.오시마 여단장은 11연대와 21연대에 명령을 하달하는 한편,전선을 절단함으로써 청국으로 빠르게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경복궁 영추문 좌:1901년 / 우: 1975년 지워진(북쪽으로 50m 물러남) 지금의 영추문>



    일본군 11연대는 경복궁 외곽을 장악하였고,21연대 2대대는 05시경 영추문을 부수고 진입하였다.2대대 7중대는 곧바로 광화문으로 나아가 수비하는 조선 병사를 몰아내고 광화문을 열었다.그리고 동쪽 건춘문으로 나아가 안에서 문을 열자 건춘문을 통해 들어온 제2대대 6중대는 북쪽 춘생문 등으로 진격했다.춘생문으로 향하던 6중대가 대궐 외곽에서 조선군과 교전이 벌어지자 5중대의 지원으로 6중대에 맞서 저항하던 조선군은 북쪽 대궐 성벽을 넘어 북한산 방향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소식에 도성 밖 병사들이 입성해 교전을 펼쳤으며,신무기였던 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항전하였으나 일본군이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자 고종은 조선군에 무장해제를 명하였고,조선군은 교전을 멈추었고 일본군에 항복한 것이다.경복궁을 점령하고,민씨 정권을 축출한 일본 공사는 고종에게 조선정부를 대신해 일본이 청군을 몰아내주기를 원한다는 공식문서를 일본 정부에 보낼 것을 강요했다.청국과 전쟁을 하는 데에 필요한 명분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경복궁 점령을 외부로 알려지지 못하게 하였으며,사건을 축소 조작하려고 철저한 언론통제를 가했다.아사히신문의 조선 특파원들이조선군이 먼저 도발했다!’오사카 마이니치신문 경성 부근에 있던 조선 병사가 우리 일본 병사를 향해 발포하여 전투가 시작되다.여기에 응전하여 전쟁 중.일본군이 조선군을 물리치고 조선 왕궁을 지켰다’모든 신문이 일본 정부에 의해 왜곡,조작된 기사를 실었다.

    <일청전사 일본제국 개전준비실정>


    일본의 역사학자 나카츠카 아키라가 후쿠시마 현립 도서관에서 발견한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일청전사(日淸戰史)초안 문서에는 경복궁 점령 사건이 조선 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 계획이란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다.계획에는 일본군이 왕궁으로 침입해 조선 군사를 몰아내고 국왕을 옹위한다고 되어 있으나 애초의 계획은 옹위가 아니라 감금이었다.문서는 경복궁 습격을 위한 부대 배치,이동 경로 등의 치밀한 작전계획이 드러나 있다.일청전사의 초안 문서는 경복궁 점령사건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여전히‘조일 양국 군사의 우연한 충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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