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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과 의자왕 항복에 관한 진실
점도 치고 풍수도 보니...唐!
2020-09-11 오후 7:27:04 서울데일리뉴스 강문갑 기자 mail mkkang117@daum.net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의 항복 때문이 아니라 신하들의 배신에 의한 것이었다.”김영관 제주대 교수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백제가 멸망할 때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을 당나라에 넘기고 그 공으로 중국에서 황실 호위무관까지 오른 예식진(615~672)일가의 묘지 발굴로 이 같은 주장이 사실로 확인됐다고 2012 1 27일 밝혔다.2010 4월 시안시 문물보호고고연구소가 당나라 고관대작들이 묻혔던 시안시 궈두난촌에서 발굴한 3기의 고분이 백제 유민인 예식진과 가족묘지임을 확인하였다.


    20117월 지린대 고전연구소가 학계에 보고한 예식진의 형 예군의 묘지명“선조는 중화와 조상을 같이한다”고 나와 있어 예씨 가문이 서기 410년에서 420년 사이 중국 산둥반도에서 웅진(공주)으로 건너온 중국계 백제인 집단임도 밝혀졌다.손자 예인수의 묘지명에는“선조의 어진 덕을 본받은 예식진은 당이 동쪽을 토벌할 때 명을 받아 그 왕을 끌고 고종황제에 귀의하게 되니,좌위위대장군으로 내원부 개국공의 훈작을 받았다”고 적혀있다.

    서기 660 7,나당연합군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우리역사에서 지워진 나라 백제.우리는 백제의 마지막을 의자왕과 삼천궁녀,그 비운의 이야기로 기억한다.백제 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641~660)은 무왕(서동)의 아들로서 백제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왕이다.의자왕의 의자는 의자에 앉아 방탕한 삶을 살아서 붙여진 이름도 아니고 그의 이름이 부여의자 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의자왕에 대해 “무왕의 원자로서 웅걸차고 용감하였으며,담력과 결단성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의자왕은 영웅적 풍모를 갖추고 있고 군사적 능력도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게다가 "형제와의 우애가 있어서  해동증자라고 불리웠다" 642 7,의자왕은 신라가 차지한 낙동강 유역을 친정하여 40여 성을 빼앗고 8월에는 장군 윤충(?~?)을 파견해 신라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군사적 위업을 쌓아가며 권력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의자왕 시기 백제영역>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백제를 치자”고 건의하는 김유신(595~673)에게 진덕여왕이“큰 나라를 침범했다가 위험하게 되면 어찌 하려는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당시만 해도 백제가 큰 나라,신라는 작은 나라였던 것이다.655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 북부를 침공해 30여 개 성을 무너뜨린다.659 4월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입해 2개 성을 함락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당 소정방(592~667)서해를 가로질러 660 6 21일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 도착했다.18만의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을 향하여 육로와 수로의 두 갈래로 공격하였다.예상치 못했던 나당연합군에 전격적인 양동작전은 백제의 방어 대책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시간이 문제였다.당시 거점성 점령 후 주변을 평정하고 진군하는 것이 전술이었으나 나당연합군은 영토가 아니라 백제의 멸망이었기에 중간 방어성을 무시하고 사비도성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나당연합군 진격로>

    백제는 당군과 신라군 중 어느 쪽을 먼저 막아야 하느냐를 고민하는 사이 당군은 저항하는 백제 수군을 격파하여 백강에 진입했고 신라군은 백제의 요충지 탄현(대전 식장산 마도령)을 넘어 황산(논산시 연산면 일대)으로 행군하였다.백제에서는 계백장군(?~660)이 이끄는 5천 군사가 황산으로 나가 신라군과 밎섰다.660 7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 황산벌에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5천 결사대의 중요한 임무는 지방군이 규합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백제의 5천 결사대는 황산벌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겼지만 화랑 반굴(?~660)과 관창(645~660)의 희생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공세에 결국 패하게 된다.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붕괴 된 후,신라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로 진격을 하였고,당나라의 소정방 군대도 사비성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오천결사대 출정상>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북쪽에 있는 웅진성으로 피신했다.사비성의 방어를 맡은 부여태와 부여융은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하였으나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들어가 2차 방어선을 구축하자 나당연합군 지휘부는 당황했다.사비성에서 의자왕만 사로잡으면 백제의 지방군도 항복하리라 여겼기에 속전속결로 백제를 멸망시키고자 했던 전략에 차질을 빚었다.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긴 의자왕은 예식진 장군과 함께 웅진성에서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나당연합군의 사비성 직공으로 백제의 지방군 전력은 보존됐다.의자왕의 전략 핵심은 지방군을 활용한 사비 포위전이었다.의자왕은 사비보다는 험준한 웅진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지방에서 올라온 지원군의 도착을 고대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 항복 직전에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웅진성에는 일촉즉발의 팽팽한 대치전이 전개되고 있었지만,소정방은 웅진성을 포위만 한 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뭔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달빛 아래 웅진성의 성주 예식진은 백제와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을 물리칠 수 있을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리고 1340여 년 후 2007년 중국 낙양에서 백제와 관련된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좌:예식진 묘지명 / 우:묘지명 탁본>


    유물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라는 직책을 가진 예식진이라는 인물의 묘지명이었다.묘지명의 발견으로 1340여 년 만에 백제 멸망의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예식진 대장군 묘지명 탁본에 나와 있는‘占風異域就日長安(점풍이역취일장안:점을 치고 풍수를 보니,()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장안에 있는 당황제의 덕을 우러러 가까이 하게 될것이다)’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배신이었다.

    백제군은 충분히 항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시간이 흐를수록 백제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나당연합군에게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던 웅진성의 의자왕은 믿었던 예식진에게 사로잡혀 항전 5일째인 718일 갑자기 항복하고 만다.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의자왕은 웅진성을 지키고자 했으나,웅진성 성주 예식진이 좌평 임자(?~?)의 무리인지라 오히려 왕을 붙잡아 당나라에 항복하려고 했다.의자왕은 배신한 부하에게 사로잡히자 자결을 시도했다.”고 기록하였다.

    즉 의자왕은 스스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웅진성 수성 대장 예식진의 반역으로 700여 년의 왕조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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