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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남연군묘-대원군의 야망이 묻힌 곳
2018-12-19 오후 12:21:59 강문갑 기자 mail mkkang117@daum.net


    남연군묘-대원군의 야망이 묻힌 곳


    1800 6 28일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꾼 날의 하나다.조선의 22대 왕으로 개혁군주이자 문예부흥을 이끈 정조가 갑작스럽게 훙서(薨逝)했다.세도 정치는 개혁 군주였던 정조 사후 그의 아들인 순조 임금부터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특정 가문과 그와 관계된 특정 집단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정을 농단한 시기를 말한다.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는 대리청정하면서 역량을 과시했으나,22세에 요절하고,효명세자의 7세 아들이 왕위에 올라 헌종이 된다.60년 넘게 지속된 세도정치 기간 조선은 이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에 시달리며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졌다.소수의 특정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치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됐고 과거제도와 같은 공정한 관리 등용 역시 무의미해졌다.권력의 독점은 왕권마저 무력화시켰다.순조 이후 헌종과 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할 정도로 세도정치의 힘은 막강했다.영화<명당>에서는 어린 헌종이 효명세자의 장례 행렬을 따르는 광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순조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19세기는 백성들이 끊임없이 민중 봉기를 일으킨 시대였다.이하응은 영조의 현손 남연군(1788~1836)()의 막내아들이며 열두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열일곱 살 때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장사 지내고 사고무친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으며,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다.당시는 안동 김씨가 세도를 누리며 왕실과 종친에 통제와 위협을 가하던 시절이라 낮은 관직을 전전했다.철종의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안동 김씨 수뇌부에서 무식하고 미련한 왕손을 고르던 중,흥선군 이하응의 얘기가 나오자 “그 자도 왕손이냐? ”고 조롱했다고 한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아래에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묘(충청남도 기념물 제80)가 자리하고 있다.(18551910)의 매천야록에는 남연군 묘를 가야산 가야사 자리에 쓰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흥선군 이하응이 안동김씨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인(藝人)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난초나 치고 한량처럼 거들먹 거리면서 돌아 다닐 때,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찾아와충청도 덕산 오서산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고,또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皇帝)가 나올(二代天子之地)가 있으니 둘 중 한곳에 선친의 묘를 쓰시오라고 했는데 흥선군이 후자를 택하자 정만인은 2명의 왕이 탄생할 제왕지지는 틀림이 없사오나 아무리 완벽한 명당이라 하더라도 조금의 결점은 있습니다.가야산은 발복이 빨리 되었다가 빨리 없어지는 곳 이라서 오서산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흥선군은 가야산을 택하였다.



    1840년 흥선군은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과정 역시 파격적이었다.가진 재산이 없던 이하응은 판서 김병학(1821~1879)을 찾아가 난을 그려주고,그 대가로 김병학이 가보로 전해오는 단계벼루를 얻어서 영의정 김좌근(1797~1869)에게 선물로 주며,김좌근으로부터 충청감사에게 절터를 남연군의 묘로 쓰는데 협조해주라는 편지를 들고, ”가산을 처분한 2만 냥의 절반을 주지에게 주고 절을 불태웠다”(매천야록).

    1844년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를 가야사 뒤쪽 절골로 옮겨서 사찰부근에 임시매장 했다.묘를 이장하는 일은 왕실 종친의 대사로 각 지방의 주민들이 상여를 운구한 바, 마지막으로  남연군의 유해를 운구한 사람들은 현재의 덕산면 광천리 사람들이 애처롭게 요령소리에 발 맞춰가며 행여라도 고인께서 편치 않으실 세라 조심조심 정성을 다 하여서 운구를 마쳤는데 이에 흡족했던 흥선군은 이 상여를 마지막 주자인 광천리 사람들에게 포상으로 기증하고 그 뒤 광천리 사람들은 죽으면 왕손이 처음으로 탔던 그 영광스러운 상여를 타고 마지막 이승 길을 떠나는 대접을 받았다.광천리 사람들이 백여년 이상을 사용한 상여는 광천리의 옛 지명이 ‘나분들’로 남은들 상여라 하여 지방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31호로 지정하고 덕산면 광천리 도로변에 상여막을 지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남은들 상여>


    명당론을 믿고 1840년부터 30년에 걸친 프로젝트가 성공하여1846(헌종12),2명의 천자가 나올 터에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1852년 둘째아들 명복을 낳았다.명복은 12세 되던 해인 1863년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재위 44)황제로 등극하고,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의 전권을 쥐게 되었으며,손자까지 순종황제(재위 3)가 되어 정만인의 예언처럼 2대에 걸쳐 천자가 탄생했지만 그후는 영속하지 못한다는 -이씨왕조가 끊어진다-는 의미였다.명당의 발복은 47년 만에 속발속진으로 끝나고 5백년을 이어온 이씨 조선은 그것으로 막을 내린 비운의 왕조가 되었다.광무 2년(1898),영면한 불세출의 걸인 대원군의 묘는 고양군 공덕리에 초장되었다가 1908년 파주군 운천면으로,1966년 무맥지(無脈地:산의 기가 없는 곳)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록에 천장된 뒤 경기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됐다.대원군의 묘는 어느 벼슬아치의 무덤만도 못하게  초라하며,보는 이로하여금 권불십년을 또 한 번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