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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여수 그리고 침묵(2)
여순사건-8일간의 전쟁
2019-01-14 오후 11:18:22 강문갑 기자 mail scottie_park@naver.com

    10 19일 아침 7,육군본부에서 14연대본부로 “LST(전차양륙정) 10 19 20:00시에 출항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14연대는 출동준비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개인장비를 제외한 출동부대의 보급품과 탄약 등의 선적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고,제주도로 떠날 대원들은 6시까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출발을 위해 내무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7 50분 비상나팔 소리가 울리자 연병장에 출동부대와 잔류부대원 2,700여명이 집합했다. 부대원들이 연병장에 집결하자 지창수 상사가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선동을 시작했다.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경찰을 타도하자.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봉기 주도자는 수십 명에 불과했으나 2천여 명의 병력이 순식간에 봉기에 가담했다. 이처럼 봉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봉기세력이 반경찰 감정을 적절하게 자극하며 선동함으로써 부대원들의 군중심리를 자극할 수 있었고,제주도 출병은 동족상잔이라며 민족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사기를 높일 수 있었다.

    10 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반란군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몇 시간 만에 여수 시내의 치안기관과 행정기관을 장악했으며,우익계 인사와 경찰관을 살상했다.반란군은 순천으로 이동해 홍순석(?~1949)이 지휘하는 제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합류하여 순천까지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10 20일 오후,여수에서는 약 3만여 명의 여수 시민들이 참석한 인민대회가 열렸고,인민의용군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여수,순천에서는 좌익세력과 청년·학생들이 봉기에 참여하면서 대중봉기로 전환하였다.순천까지 장악한 14연대는 10 20일 밤 세 그룹으로 군대를 재편후 벌교,학구,광양 방면으로 진출하였다.21일에는 인근 벌교,보성,고흥,광양,구례를 거쳐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10 20,정부는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인 준장 로버츠,국방장관 이범석,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를 열고,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 제5여단 사령부에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으며,여수와 순천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진압작전에는 작전가능한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다.그러나 3일간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23일 미 군사고문관의 지휘하에 탱크와 군함의 함포사격 등의 지원을 받아 여수와 순천에 대한 집중공격을 실시했다.하루가 넘는 교전 끝에 23일 순천을 장악했고,25일에는 여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탈환했다.여수 진압작전은 10 26일부터 시작되었다.진압군이 여수에 진입하고 보니 시내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반란군은 이미 24일 밤 소형선박을 타고 탈출해 산 속으로 도주했던 것이다.여순 봉기를 계기로 군장병들이 입산함에 따라 중위 김지회 등 반란군 1천 여명은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장기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는데,이는 남한 무장 유격전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진압과정에서 민간인이 많이 희생되었다.진압군이 여수에 진입하였을 때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이미 여수를 빠져나간 상태였으나,진압군은 좌익세력과 반란 가담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무차별로 가혹한 무력을 사용하였다.여순 사건이 엄청난 규모의 양민 학살로 비화한 것은 진압이 종결된 후로 수개월 동안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숱하게 학살됐다.당시 공표된 '남녀 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 불순분자를 다 제거하라'는 이승만의 담화문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피해상황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진압군은 141명이 사망,203명이 실종,391명이 반란군 측에 합류했으며,반란군은 821명이 사망했고,2,860명이 체포되었다.1948 11월 말 미군소식통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약17,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반란에 참가했다는 혐의를 받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그들 중 866명이 사형언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