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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논개(朱論介)
2019-03-11 오후 10:57:14 강문갑 기자 mail mkkang117@daum.net

    [주논개 (朱論介)-길이길이 푸르리니(1)]

    1592 10,1차 진주성 전투에서 참패한 왜군은 1593 6,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유린하기 위해 10만에 가까운 대군을 이끌고 재침공했다.왜적에 맞선 진주성은 군관민의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함락되고 말았다.이 전투로 성 안에 있던 군인과 민간인이 전멸하였는데,죽은 사람의 수가 조선인 7만 명,왜인 2만 명이었다.어느 쪽을 택하든 당시 인구를 감안할 때 전투의 참상을 전해주기에 충분한 숫자다.진주성을 함락하고 왜군은 촉석루에서 전승 축하연을 벌이게 되었는데,논개(1574~1593)는 기녀로 가장하여 그들의 여흥을 돕게 되고,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바위 위에서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시퍼런 강물에 몸을 던져 함께 투신한다.그녀의 거사는 승리에 도취된 왜군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한 것이었다.논개의 순국은 1594년 순안어사로 하삼도의 피해상황을 살피러 온 유몽인(1559~1623)에게 전해지고,<어유야담>(1621)에 기록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조선왕조 실록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어유야담을 읽은 진주의 선비들은 1692년에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으며,1721년에는 의암사적비를 세웠다.1740(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의기사(義妓祠)를 건립하였다.의기사 현판에는 정약용,매천 황현,기생 산홍이 논개를 예찬하며 쓴 글이 걸려있다.1780년 진주를 방문한 다산 정약용은 <진주의기사기>(晉州義妓祠記)라는 글에서 조정에서는 전공을 시기하고 패배를 달갑게 여겨 성곽의 견고함을 적에게 넘어가게 하였으니,충신지사들의 분계 함이 이 싸움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그러나 한 여인이 왜장을 죽여 나라에 보답할 수 있었으므로 군신간의 의리가 천지간에 밝혀졌으니 한 성의 패배쯤은 근심 할 것이 없다.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라고 적고있다.또한 일개 이름 없는 창기도 절개를 지켰는데 사대부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논리로 당대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사례로 논개 이야기를 인용했다고 한다.황현은 논개를 기리는 시에서 “천년의 기생 역사에 한 줄기 빛을 발했다”고 썼다.

    <의기사>

    1970년 은퇴한 일본인 건축사 우에츠카 하쿠유는 자신 소유의 밭을 갈다가 묘비를 발견한다.그 비석은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승승장구한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진주성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에서 조선의 여인 논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부끄럽고 억울해 영혼을 달래준다는 이유를 만들어 조선 여인의 영혼을 함께 모시는 일을 추진하기위해 1976년 한국에 와 진주시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한일간의 역사적 화해를 위해 합동위령제를 제안하자 우리측에서도 동의하여,1천 마리의 학을 강에 띄우며,위령제를 지냈고 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논개의 영정과 똑 같은 것을 만들어 함께 돌려 보낸다.그는 일본 영언산에 보수원이라는 게야무라의 사당으로 가 논개와 왜장의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논개의 영정을 왜장의 영정 오른쪽에 나란히 두는데,문제는 왜장 왼쪽에 왜장 아내의 영정이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왜장을 중심으로 처와 첩이 있는 모양새였다.이곳을 찾은 일본인들은 논개부인이 나라를 위해 투신한 여인이 아니라 적장을를 사랑한 첩이 되버린 것이다.이후 일본인들은 '논개의 위패 앞에서 빌면 아이를 잘 낳는다'고 알려질 정도로 부부금술의 상징이되어 논개를 잡신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당시 진주시장을 비롯해 몇몇 인사들은,한일간의 역사적 화해와 교류,영혼들의 천도제라고 생각하고,우에츠카의 양심적인 일본인이란 이미지에 넘어가,감사장까지 수여하였다.1996,논개의 영정이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금차봉납도>를 그린것으로 알려진 이당 김은호(1892~1979)의 그림이라는 점으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대두되자,이 소문을 전해들은,그는 1996년 여름에 의기사에 걸려 있는 논개 영정을 자신이 사겠다며 한국에 왔다.그간 몇몇 진주사람들만 알았던 일이,우에츠카가 논개의 영정을 사가겠다며  언론에 보도되고,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기사화되자,민간단체에서 19984월 정부에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줄 것과 진주 남강에서 불러간 논개의 영혼과 전북 장수마을의 돌로 만든 논개 비석 등을 정부 차원에서 찾아줄 것을 요구하였다.이런 노력 덕택에 외교통상부는 2000년부터 일본 논개사당에서 열리던 '한일합동위령제'에 후쿠오카 총영사관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조치했고,사당의 일부 유물들이 국내로 돌아오기도 했다.'보수원'에 있던 영정은 논개의 출생지로 알려진 전북 장수군에,비석은 후쿠오카 총영사관에 각각 모셔져 있다.논개의 치욕은 25년이나 지속되었고 이를 발견한 우리측의 반발로 2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한편 논개 영정은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논개영정을 제작한지 2년여의 산고 끝에 2007 12 27일 문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에서 새로운 논개 표준얼굴로 최종 통과되어 2008 24일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게 된다.


    <좌:과거 논개영정(김은호 작),우:현재 논개영정(윤여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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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서울데일리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9-03-11 22:57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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