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대원위분부-철원매주(撤院埋主)하라
2020-04-02 오후 10:23:17 서울데일리뉴스 강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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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일대에 위치한 화양구곡(華陽九曲).빼어난 경관을 자랑하지만,여기에 역사가 얽히면 보는 사람의 심사가 복잡해진다.송시열(1607~1689)이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화양동계곡의 수려한 경관 아홉 곳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고,화양동이란 지명도 원래 황양목(회양목)이 많아 황양동이라 불렀으나,송시열이 중국을 뜻하는 중화(中華)의 ‘화’와 일양래복(一陽來服)의 ‘양’을 따서 화양동이라 하였다.화양(華陽)에는 청이 망하고 명이 부활하기를 바라는 송시열의 염원이 담겨있는 셈이다.송시열은 스스로를 소중화라며 명나라 의복과 평정건을 썼다.

<대명천지 숭정일월>


화양구곡 제3곡 읍궁암 옆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준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의종(숭정제)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만동묘(萬東廟)와 송시열을 제향한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다.그러나 화양서원이 처음 세워진 1695(숙종 21)에는 화양동 밖 만경대에 위치했으나,만동묘가 세워진 후인 1709(숙종 35)년 만동묘와 왕래가 불편하고 서원수호의 이유로 지금의 터로 이전하였다.5곡 첨성대에 있는 바위에는 송시열의 친필인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 새겨져 있는데,직역하면 온 세상이 위대한 명나라 것이고 해와 달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종)의 것이라는 의미다.학자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지만 존명 사대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만동묘는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萬折必東)'()자와 동()자를 차용한 것이며,'황하는 만 번을 굽어 흘러도 결국 동쪽으로 흘러든다'는 의미로 어떤 상황에서도 명나라 황제에 대한 마음은 변 할 수 없다는 충성서약이며,만동묘의 양추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아주 가파르고 높아서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허리를 굽히고 오르도록 설계가 된 것이다.명나라 황제를 등에 업고 기생한 유생들은 약 160여 년 동안 병역과 조세를 면제 받는 등 온 갖 횡포의 온상이 되었다.아이들이 벼슬의 순서를 읇은 노래에는 임금 위에 만동 묘지기라고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양추문 오르는가파른 돌계단>

국가로부터 공인된 사액서원 어필 현판과 노비를 하사받고,서원이 소유한 토지 중 3(1: 3,000)은 면세혜택이 주어졌다.서원의 정원은 군역을 피하는 피역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사액서원은 20(비사액서원은 15)으로 하였고,노비의 수는 사액시 주는 노비를 포함하여 7명까지 둘 수 있었다.서원이 사립교육기관으로 명종대에 17개소,선조대에는 100여개소,18세기 중반에는 700여개소에 이르자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고,서원의 노비는 국역을 지지 않았으니,서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도 문제가 생겼다.


숙종은 화양서원에 20결에 이르는 많은 토지와 다수의 노비를 지급하였다.영조는 1725년과 다음해 두 번에 걸쳐 직접 신하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정조 역시 1776년과 1782년 두 번 신하를 보내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이렇듯 화양서원은 숙종영조정조 3대에 걸쳐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그러자 화양서원은 권력을 남용,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갔다.제사를 지내는 시기가 되면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수탈하기까지 이르렀다.


화양묵패는 서원에서 지내는 제사를 위해 물품과 경비를 정해진 날짜에 헌납하라는 문서였다.일단 묵패를 받으면 양민은 물론 지방 수령도 거역하지 못할 정도였고,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하였다.그렇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다.매천 황현(1855~1910)화양서원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충청도 일원의 무뢰한 세도가들 자제들이다.그들은 화양묵패를 가지고 평민을 잡아다가 가죽을 쪼고 골수를 빨아먹는 남방의 좀이자.그 유래가 백년이 되었으나 지방의 수령들이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따지지를 못하였다.’라고 했을까. 

<만동묘와 화양서원 전경>


조선시대의 국정 명령 집행 문서는'왕약왈(王若曰:왕은 이르노라)'로 시작하는 반면,대원군 섭정기에는 명령 집행 문서에 왕약왈 대신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대원위가 분부한다)'가 앞에 붙었다고 한다.<매천야록>에는 운현이 국정을 맡은 10년동안 위엄이 중앙과 지방에 두루 행해졌다.‘대원위분부 大院位分付’ 다섯자가 삼천리를 바람처럼 통행하니 벼락이나 끓는 물처럼 아전과 백성들이 벌벌 떨며 항상 법망에 걸릴까 두려워 하였다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폐단이 극심해지자,1865(고종 2) 조정에서는 대보단(大報壇)에서 명나라 황제를 제향하므로 별도로 만동묘에서 제향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방(紙榜)과 편액(扁額)을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하였다.1868(고종 5) 대원군은 서원을 망국의 근원이라고 선언하고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사원도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원매주 하라(撤院埋主:서원을 철폐하고 사당에 모신 위패인 신주를 묻어라(撤院埋主之節大院君分付擧行事)”명하였다.마침내 1871(고종 8) 3,사액서원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였다.

<위패봉안 매주시설>


<근세조선정감>에 의하면 유생들이 반발하여 시위를 벌였으나,대원군이 명령을 내려서 나라 안 서원을 모두 허물고 서원 유생들을 쫓아 버리도록 하였다.감히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이라 하였다.사족이 크게 놀라서 온 나라 안이 물끊듯 하였고 대궐 문간에 나아가 울부짖는 자도 수십만이나 되었다.조정에서는 어떤 변고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게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입니다.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라고 간언하니,


대원군은 대노하여 말하였다.‘진실로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은 도둑의 소굴이 됨에 있어서랴서원을 철폐하는 대원군에 백성들은 환호했으나 서원을 거점으로 특권을 누리던 사림세력들은 완강하게 저항했다.대원군은 결국 유림세력과 서원권력의 탄핵으로 실각하기에 이른다.대원군의 집권 10년은 쇄도정치와 맞서 싸우며 부국강병을 위한 민생개혁을 단행했다.그 모든 것은 무너져가는 조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하지만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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